재난 대비는 언제부터 '유난'이 아니게 됐나
2016년 경주 지진과 2017년 포항 지진, 코로나19 사재기, 일본의 '방재' 문화까지. 비상 대비가 유난에서 생활 습관으로 바뀐 계기를 연표로 짚고, 비축과 사재기의 차이를 정리했다.
현관에 비상 배낭을 두는 사람을 보면 한때는 "무슨 전쟁이라도 나냐"는 말이 먼저 나왔다. 대비는 불안이 많은 사람, 조금 유난스러운 사람의 취미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다. 지진이 나면 생존 배낭 판매가 늘었다는 기사가 나오고, 지자체는 비상용품 목록을 나눠 준다. 대비는 언제, 무엇 때문에 보통의 일이 됐을까.
이 글은 그 전환점을 연표로 따라가며, 한국 사회가 재난을 겪을 때마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기록으로 짚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주 섞이는 두 가지, 대비와 사재기를 구분한다.
'유난'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나
대비가 유난처럼 보였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대비는 오랫동안 전쟁과 짝지어 기억됐다. 1975년 창설된 민방위는 공습 대비에서 출발했고, 비상용품 하면 방독면과 대피소가 먼저 떠올랐다. 대비를 한다는 건 곧 전쟁을 걱정한다는 뜻처럼 읽혔다. 냉전기 미국에서도 방공호 붐이 공포와 함께 왔다가 공포와 함께 식었다. 그 흐름은 1950년대의 대비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것에서 자세히 다뤘다.
또 하나는 **"한국은 지진 걱정은 없는 나라"**라는 막연한 인식이었다. 태풍과 장마는 해마다 겪지만, 지진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 인식이 흔들린 것이 2016년 9월이다.
땅이 흔들린 뒤: 경주와 포항
2016년 9월 12일 오후 8시 32분,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일어났다. 기상청이 1978년 지진 관측을 시작한 이래 한반도에서 기록된 가장 큰 지진이었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이어지는 여진 속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지진 대비'를 자기 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장바구니에서 먼저 드러났다. 지진 직후 일주일(9월 12~19일) 동안 온라인 쇼핑몰의 안전용품 판매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제도도 움직였다. 경주 지진 당시 긴급재난문자는 지진이 난 지 수 분이 지나서야 발송됐고, 일부 이용자에게는 아예 도착하지 않아 비판이 컸다. 당시에는 지진을 관측하는 기상청이 아니라 다른 기관을 거쳐 문자를 보내는 구조였다. 이 업무는 2017년부터 기상청으로 넘어갔고, 정부는 2016년 12월 내진설계 의무 확대 등을 담은 지진방재 종합대책을 확정했다.
1년여 뒤인 2017년 11월 15일에는 포항에서 규모 5.4 지진이 났다. 다음 날로 예정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993년 도입 이래 처음으로 일주일 연기됐다(11월 16일 → 23일). 시험장 학교 곳곳에서 균열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재난이 온 나라의 일정을 멈출 수 있다는 걸, 수험생이 있는 모든 집이 체감한 순간이었다.
흔들림이 시작되면. '지진 나면 어디로 가야 하나'는 막상 닥치면 떠올리기 어렵다. 첫 1분의 행동 순서를 미리 읽어 두자. → 지진 발생 첫 60초, 무엇을 해야 하나
팬데믹: 사재기와 비축은 다르다
2020년 봄, 코로나19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재난이었다. 홍콩, 일본,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는 화장지 사재기가 사회 문제가 됐다. 한국에서는 마스크가 문제였다. 정부는 2020년 3월 9일부터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해,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요일을 나누고 1인당 주 2매씩 공적 마스크를 사게 했다.
이 시기에 '대비'라는 말은 종종 '사재기'와 한데 묶였다. 하지만 둘은 정반대에 가깝다.
"대비한다는 건 결국 사재기"라는 건 오해다. 사재기는 위기 소식이 퍼진 뒤 불안이 정한 양을 한꺼번에 사는 일이고, 그 결과 정말 필요한 사람의 몫이 줄어든다. 비축은 평상시에 가족 수와 날짜로 계산한 양을 조금씩 갖춰 두는 일이다. 미리 준비한 사람일수록 위기 때 줄을 설 필요가 없다.
| 구분 | 사재기 | 평소 비축 |
|---|---|---|
| 시점 | 위기 소식이 퍼진 직후 | 평상시, 조금씩 |
| 양을 정하는 기준 | 불안의 크기 | 가족 수 × 버틸 날짜 |
| 주변에 미치는 영향 | 품귀를 키워 다른 사람의 몫을 줄인다 | 평소 소비에 섞여 분산된다 |
| 관리 | 한꺼번에 사서 유통기한도 한꺼번에 다가온다 | 쓰면서 채우는 순환 |
| 심리 | 불안을 키운다 | 불안을 덜어 준다 |
일본의 '방재': 기념일과 책 한 권
대비가 생활이 된 사회를 이야기할 때 일본을 빼기는 어렵다. 일본은 1960년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했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간토대지진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대비를 해마다 돌아오는 달력 위의 날짜로 만든 것이다.
2015년 9월 1일부터 도쿄도는 방재 안내서 〈東京防災(도쿄방재)〉 약 750만 부를 도내 모든 세대에 나눠 주기 시작했다. 2023년에는 일상의 대비를 다룬 행동편과 지식편, 두 권으로 새로 펴내 다시 전 세대에 배포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귀가 곤란 경험은 기업에 직원용 3일분 비축을 요구하는 도쿄도 조례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도심이 고립되는 시나리오, 실제로 가능한가에서 다뤘다.
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는 건 대비를 특별한 결심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정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기념일, 집집마다 꽂혀 있는 책 한 권, 회사의 비축 창고. 개인의 의지에 기대지 않아도 대비가 굴러가게 하는 장치들이다.
불안이 아니라 습관으로
한국의 대비 문화는 아직 일본처럼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흐름은 분명하다. 지진, 감염병, 폭우, 통신 장애를 연달아 겪으면서 대비는 특정한 재난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생활의 기본값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습관이 된 대비는 요란하지 않다. 소화기 위치를 아는 것처럼, 몇 가지를 정해진 때에 확인하는 일이다.
- 날짜에 묶기: 계절이 바뀔 때, 또는 매년 같은 날 비상용품을 점검한다 → 계절 점검 체크리스트
- 일수로 계산하기: 가족 수 × 버틸 날짜로 물과 식량의 양을 정한다
- 쓰면서 채우기: 비상식량을 평소에 먹고, 먹은 만큼 다시 사 둔다. 유통기한 관리가 저절로 된다
- 작게 시작하기: 물·빛·연락 세 가지부터 → 딱 세 가지만 먼저 하세요
지금 우리 집이 어느 정도 준비돼 있는지 궁금하다면 재난 대비 진단으로 빈틈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생존 배낭은 언제부터 관심이 커졌나요?
한국에서는 2016년 9월 경주 지진이 뚜렷한 계기로 꼽힌다. 지진 직후 일주일 동안 온라인 쇼핑몰에서 생수, 손전등, 소형 백팩, 전투식량 판매가 전년보다 크게 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후 지진과 감염병, 폭우를 연달아 겪으며 비상용품은 특별한 사람의 물건이라는 인식에서 점차 벗어났다.
지진 재난문자는 누가 보내나요?
2016년 경주 지진 때 재난문자가 늦게 발송된 뒤, 2017년부터 지진 재난문자 발송 업무가 관측 기관인 기상청으로 넘어갔다. 지진을 관측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문자를 보내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비상용품을 미리 사 두는 것도 사재기 아닌가요?
아니다. 사재기는 위기 소식이 퍼진 뒤 한꺼번에 사서 품귀를 키우는 행동이다. 평소에 가족 수와 날짜로 계산한 양을 조금씩 갖춰 두는 비축은 위기 때 한꺼번에 사러 나갈 필요를 없애 준다.
- 2016 경주·2017 포항: 지진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됐고, 재난문자는 기상청 직접 발송으로 바뀌었다
- 2020 코로나19: 사재기와 비축의 차이가 드러났다 — 비축은 평소에, 일수로 계산해서
- 일본의 방재: 기념일과 안내서처럼 대비를 반복되는 일정으로 만든다
- 습관의 핵심: 날짜에 묶고, 쓰면서 채우고, 작게 시작한다
대비가 유난이 아니게 된 건 사람들이 더 불안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여러 번의 재난을 지나며 준비한 사람이 덜 흔들린다는 걸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비상 배낭은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그 경험이 남긴 가장 조용한 기록이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 2016년 경주 지진
- 한국일보 — "지진 무서워" 피난·재해 대비용품 판매 급증 (2016.9.21)
- 이데일리 — '지진에도 재난문자 늦은 이유가'…기상청 문자 발송 권한 없었다
- 서울신문 — '포항 강진' 사상초유 수능 연기 (2017.11.16)
- 한국일보 — '코로나 공포' 속 세계, 왜 '화장지 사재기'만 심할까 (2020.3.17)
- 서울신문 — 마스크 5부제 시작…약국 방문 전 주의할 점은? (2020.3.9)
-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 마스크 5부제 시행 현황 등 공적판매 수급상황 발표
- 内閣府 防災情報のページ — 過去の災害に学ぶ: 関東大震災と防災の日
- リスク対策.com — 東京都、防災ブックを都内全世帯に配布 (2015.8.25)
- 東京都防災ホームページ — 防災ブック「東京くらし防災」・「東京防災」の配布について
-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 Pohang Heunghae building-1 (Sim1992, CC BY-SA 4.0)
-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 COVID19 South Korea pharmacy long line (Rickinasia, CC BY-SA 4.0)
- 영상 출처: YTN — 지진으로 수능 일주일 연기...사상 초유